어머니의 품, 지리산 언저리의 가을 들판을 거닐다.
요즘은 가족 모두가 참여하는 캠핑 떠나기가 정말 힘이 듭니다.
지난 주도 시험을 앞둔 두 아이를 집사람과 함께 떼어 놓고
길을 나섰습니다.
개천절 휴일과 아이들 말대로 '갈토'의 근무도 휴가를 내고 홀로 떠난 나들이
잼나는 이야기도 별로 없고, 시샘이나 하는 듯 잔뜩 흐린 연무(燃霧, haze) 때문에 사진도 신통치 않아
후기를 그냥 넘겨 버릴까 하였는데,
여기 저기 들려오는 즐거운 비명소리에 배도 아파오고(*^^*)
이런 발자취도 시간이 지나면 나름 추억이 되겠다는 생각에
한 주 늦어 버린 '가을 바람 난 미리벌'의 지리산 언저리 방황기를 올려 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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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로운 이 가을, 3박 4일을 내 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지만
혼자만 나 댕기는 일이 다소 미안했던 터라, 이 눈치 저 눈치를 보다
금요일 오후가 되어서야 부랴 부랴 길을 나섭니다.
또 다시 섬마을이 땡기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지리산 기슭으로 방향을 잡아 봅니다.
여름 내내 아껴 두었던 오도산으로 향하는 길
가는 곳곳 그야말로 황금 벌판이 펼쳐 지고
합천 인근의 '황금들'을 배경으로 잘 생긴 느티나무 한 그루가 발길을 잡습니다.
늦장을 부려 출발하였지만 일몰을 볼 욕심에 황급히 오도산 중계소로 향하는 길을 올라 봅니다.
연무가 뿌옇게 끼었지만, 산상에서 맞는 기대 이상의 일몰은
혼자만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마냥 황홀경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코스모스만이 애처롭게 인사를 건네는 오도산에서의 해넘이와 박명(薄明) 속에서
하나 둘 저녁살이를 준비하는 삶 터의 불빛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산정에
초승달이 떠오르고서야 비로소 산을 내려 옵니다.
오도산 중계소의 공터에서 노숙을 해볼까 생각도 했지만
인적 없는 오도산 휴양림에서의 운치있는 하룻밤도 괜찮을듯 하여
홀로 불 밝혀 허기를 면하고 맥주 몇 캔으로 내일을 기대해 봅니다.
휴대폰 알람을 잘못 맞추어 해돋이를 놓칠뻔 했지만
다행히 이른 새벽 운해 자욱한 일출을 볼 설레임으로 꼬불꼬불 산길을 다시 오릅니다.
일교차가 20도 가까이 나는 날씨에다, 안개도 낄거라는 일기예보에 내심 기대가 컸었는데
1,130m 오도산 중계소로 오르는 길에는 있어야 할 운해는 간곳 없고
심술궂게 자리를 잡고 있는 지독한 가스층만이 마음을 답답하게 합니다.
억새 너머 여명을 밝혀 오는 해님에 만족해야 합니다.
이곳 오도산은 사진하는 분들에게 이름 난 곳으로
주변에 합천호를 끼고 있어 연중 그림같은 운해를 자주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저는 아직 덕을 더 쌓아야 할가 봅니다.
지천에 널린 구절초 무리에게 위안을 받고 휴양림으로 내려 옵니다.
집에서는 잘 챙기지도 않는 아침 상을, 바깥에 나오면 혼자라도 챙겨 들게 됩니다.
비록 햇반 데워 김치 한 조각 걸쳐 먹는 조촐한 상이지만
자연에서 맞는 아침향이 배어 나는 그 성찬을 잊지 못하기 때문인가 봅니다.
다시 올망 졸망 익어가는 조랑논을 돌고 돌아 길을 나섭니다.
거창 휴게소를 지나 오래된 친구같은 함양상림으로 발길을 정합니다.
한철 지나버린 상림의 연밭에는 이름도 생소한 외래종의 수련만이
화려했던 지난 여름을 기억할 뿐입니다.
마지막 향을 피워 벌과 등에를 유혹하는 이 녀석의 이름은
정감이 가는 이름, 우리 가족의 보금자리 '안타레스'입니다.
그 이름도 일일이 기억할 수 없는 생소한 수련들과 함께 한 상림은
이미 나 혼자만의 차지는 아닌가 봅니다.
올해 가을도 역시 이루지 못한 꽃무릇과의 안타까운 재회를 뒤로 한 채
지난 흔적 위로 새 가을을 준비하는 상림을 거닐어 봅니다.
공익으로 보이는 총각의 일터로 찾아 온 처자...
저들은 가을 속 '봄날'을 한창 달리고 있습니다.
들판 너머 교회 종탑이 한가로운 지리산 자락
지안재를 넘어 마천땅으로 향해 봅니다.
칠선계곡 초입에 자리한 서암정사에서 한 자락 가을을 담아 봅니다.
남해 다랭이논 만큼이나 이름이 알려진 마천 다닥논을 찾아 봅니다.
이곳도 그림같은 풍경을 제대로 담을 수 없음에
아쉬움만 가득 안고 돌아 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봄부터 땀 흘린 수고로움이 빚어 낸
비좁은 계단마다 가득 가득 넘치는 풍요로움은
길손의 아쉬운 마음 한 자락 씻어 주기에 충분합니다.
함양에서 시작하여 지리산 북쪽을 시계반대 방향으로 돌아 가는 길
마천에서 실상사를 지나 정령치 아래 남원땅을 향해 길을 서두릅니다.
춘향골로 접어 들어 인물 좋기로 유명한 육모정 인근의 폭포를 보고 가기로 합니다.
가파른 산길을 땀 깨나 흘리고서야 구룡폭포가 모습을 드러 냅니다.
가을옷 제대로 차려 입으면 그 인물 더욱 빼어날 구룡폭을 뒤로 한 채
지리산의 바람과 햇살 속을 거닐어 봅니다.
만만하게 살기에는 세상살이 녹녹치 않나 봅니다.
굿판에라도 희망을 걸어야 하는 이들이 마음을 착찹하게 합니다.
대구팀들이 모여 있다는 연곡사로 향하는 길
지리산 온천에 들러서 땀내나는 몸 잠시 씻어 봅니다.
단풍 곱기로 유명한 피아골 연곡사 입구의 야영장에 자리한
반가운 얼굴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하룻밤 홀아비 신세를 잊어 봅니다.
혼자만의 나들이에서는 새벽이 되면 저절로 눈이 떨어 집니다.
여명이 밝아 오기도 전, 참으로 오랫만에 연곡사를 찾아 봅니다.
이곳은 멋진 숲 길과 함께
각각 국보로 지정된 연곡사 동부도, 북부도를 비롯하여
보물로 지정된 서부도와 삼층석탑, 동부도비, 현각국사탑비 등
작은 절집에 우리나라 부도 문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문화재가 즐비합니다.
야생 차밭 꽃 향기 그윽한 이른 아침
사색에 잠기기 좋은 이곳 연곡사 부도 숲에 걸터 앉아
단풍 고이 든 어느 가을 날
"내 인생의 여름은 그래도 푸르렀노라"고 말할 수 있을지
걸어 온 길 잠시 숨고르고 뒤돌아 봅니다.
쌍계사, 화엄사, 천은사, 실상사.....
그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지리의 고찰들 사이에서
이곳 연곡사는 오랫 동안 기억에 남는 곳입니다.
부도군 외에는 화려한 볼거리도, 치밀한 짜임새도 없지만
어머니와 같은 지리산, 그 산을 가장 빼어 닮은 절집이기 때문입니다.
뒤늦은 정열로 한창인 석산 한무리를 깨우는 풍경 소리에
아침도 깨고, 비로소 나도 깨어 발길을 돌려 봅니다.
이곳 피아골 자락의 야영장에도 머지않아 가을이 나리려나 봅니다.
오토캠핑에는 아쉬운 점이 많은 야영장이지만
나름 잘 관리되고 있는 연곡사 야영장
그렇게
정다운 이들과 함께 나누는 아침이 풍요롭습니다.
아쉬운 발걸음과 함께 인사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
고인 듯, 말없이 흐르는 섬진강 그 젓줄을 따라
코스모스 곱게 핀 하동 악양 들판을 찾아 봅니다.
故 박경리 선생을 추모하는 만장이 물결치는 그 곳
토지의 무대, 최참판댁 들녁은 허수아비 축제가 한창입니다.
황금 들판이라는 표현이 썩 잘 어울리는 그곳을 지나
허수아비 무리의 배웅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 옵니다.
원래 계획은 화려한 볼거리가 있다는 진주 촉석루의 '유등 축제'를 거쳐 오려 했으나
먼 길 떠나 보내고 아이들과 씨름하고 있을 집사람이 눈에 밟혀 귀가길을 앞당기기로 하였습니다.
내친 김에 사람사는 내음 가득한 마산 어시장에 들러 장을 보고 갑니다.
마음 편히 길 떠날 수 있는, 내 인생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 가족을 향해
싱싱한 해물탕 한 냄비에 고마운 마음 가득 담아 함께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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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어김없이 찾아 오고 있는
가을을 맨발로 마중 나간 이번 캠핑은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 줄기따라
지리산 자락을 한바퀴 돌아 보았습니다.
그곳에도 사람 향기 가득한
정겨운 시간들이 흘러가고 있었으며
마지막까지 정갈한 모습 잃지 않고
남은 향 불사르는 차꽃처럼
바쁘게 살아 온 우리네 하루,
아름다운 모습으로 마무리 하시는
멋진 해님의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아련한 어머니의 품 같은
지리산 언저리의 가을 들판 그곳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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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3-5
오도산휴양림, 연곡사 캠핑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