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 미리벌 父子의 산에서 보내는 편지
언제부터인가 생활이 되어 버린 바쁜 일상이 그리 싫지 않습니다.
몇 주 지나면 두 달 일정으로 스위스 캠프를 떠날 솔민이와의 父子캠핑을 꼭 해보아야 겠다고 생각했었는데
현충일 징검다리 연휴를 맞아 저는 휴가를, 솔민이는 체험학습을 신청하고 3박 4일 둘만의 캠핑을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이번에는 어디로 떠날까 행복한 고민을 하던 차에
미리내의 요청에 의해 중간에 합류할 수 있는 근거리의 캠핑지를 물색하게 되었습니다.
창원에서 100km 안에 드는 곳을 찾아보던 중
몇 번 마음을 주었지만, 막상 가보지 못했던 '신불산휴양림'을 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푸르른 숲과 맑디 맑은 계류 그리고 사랑하는 이와의 대화로 이어진
신불산 숲 속에서의 休 캠핑을 되돌아 봅니다.
(F11을 꾸욱 누르고 함께 해 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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궂은 날씨에 다음날 아침 일찍 출발하라는 미리내의 애교 섞인 '물타기 작전'에도 넘어가지 않고
목요일 늦은 밤이 되어서야 난생 처음 아들과 단둘이 함께 할 캠핑지를 향해 출발합니다.
김해, 부산지역의 고속도로가 꽉 막힌다는 '57분 교통정보'를 듣고
진영-밀양-얼음골-배내고개를 넘는 국도코스로 괘도를 수정합니다.
국도중 국내 최장의 길이를 자랑하며 얼마전 임시 개통되었다는 가지산 터널은
연결도로의 복구 공사로 불통이라 석남고개를 넘기로 합니다.
인적 없는 늦은 밤 비는 내리고....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그 곳을 향해 달리는 심사가 편하지는 않지만
낯선 곳을 향한다는 묘한 설레임을 안고 고개를 넘습니다.
석남터널을 지나자 다행히 비는 잦아 들지만
이번에는 말 그대로 '한치 앞' 본넷이 보이지 않는 안개가 배내고개를 점령하고....
설레임은 불안으로... 점차 두려움으로까지 번져 갑니다.
얼마전 영호남방 신고식으로 이곳을 찾았다 그냥 돌아갔다는
'아리잠'님의 기분이 이런 것이었을까 하고 느껴 보기도 합니다. ㅋ~
상단 휴양림 끝자락에 간단하게 텐트만 치고 잠든 아들 녀석을 누입니다.
캔맥주를 친구 삼아 밤 안개에 젖은 숲을 한동안 바라보며 첫날 밤은 그리 깊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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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불산폭포휴양림' 상단의 오토캠핑장 전경
데크와 옆에 차를 댈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습니다.
(오토캠핑장이라 하긴 거시기 하지만, 일반 휴양림 데크 가까이에 주차를 할 수 있다는 개념으로 이해하면 될 듯)
오토캠핑장의 데크가 10개, 일반 야영장까지 합해도 20 동 남짓한 작은 휴양림이지만
숲과 계곡이 함께 하는 가장 가까운 휴양림이라 성수기 인파만 피한다면 즐겨 찾고 픈 곳입니다.
오캠장 가장 끝자락에 위치한 이 곳 정도만 라운지가 가능할 듯 합니다.
텐트 한 동에 타프를 걸치고 휴양림 테이블을 이용하니 정말 간편합니다.
길가 슈퍼에서 사온 목살 한근과 맥주 한 묶음이 이번 캠핑 장보기의 전부 인지라
아빠의 정성(!)으로 끓인 김치찌게와 집에서 싸온 찬으로 아침을 해결합니다.
숲으로 내려 비치는 찬란한 아침 햇살 한 줌으로
어느 식탁보다 풍성했건만 녀석은 아닌 것일까요?
새벽녘에 출발 하셨는지 하단에서 험한 산길을 타고 아침 일찍 올라오신 분들이 한 차례 쉬었다 가십니다.
어느새 친구가 되어 버린 다람쥐들과 이른 아침을 보내고
한적한 숲 길을 따라 아들 녀석의 손을 잡고 걸어 봅니다.
몇 해에 걸쳐 만들어졌을 푹신한 낙엽 길보다도
꼬옥 잡은 아들의 손을 통해 전해오는 느낌이 훨씬 포근합니다.
'폭포자연휴양림'이란 이름 값을 하는 것일까요?
간밤에 내린 비 때문인지 폭포로 향하는 숲 길 옆에는 손 시린 맑은 계곡이 흐릅니다.
낮은 곳으로 몸을 맡기고 그냥 그렇게 흘러가는 저 물줄기도
강을 이루고 바다가 되어 유장하게 흘러 가겠지요.
높은 곳만 바라보며 바쁘게 살아가는 세상살이에서
나보다 더 낮은 곳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가져보길
아직은 어린 소년에게 욕심부려 봅니다.
하지만, 머지 않아 소년은 보금자리에서 차고 일어나
저 멀리 저만의 세상을 향해 홀로 나아 갈 겁니다.
눅눅한 대지를 향해 내려 비추는
개꽃 이파리의 반가운 한 줌 햇살보다...
함께 할 수 있는 지금 이 시간이
간절히 소중한 이유입니다.
캠핑장에서 항상 개구장이로만 알았던 녀석이
떨어진 꽃 잎 몇 개 주워 불쑥 내밉니다.
"아빠, 이것 좀 보세요. 이쁘~지요!"
'부모는 가장 훌륭한 스승'이라는데
세상의 존경받는 스승의 길 보다는
먼저 내 아이들의 좋은 스승으로 남고 싶은 순간입니다.
시린 계곡 물에 마음 한자락 담구어 보며
푸르름에 취해 오솔길을 걷다보니 목적지인 파래소 폭포가 가까워 옵니다.
지나온 길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겠지만
'전망대'로 향하는 새로운 길을 흔쾌히 동행해 주는 녀석이 기특합니다.
낙엽으로 이루어진 계단 길을 따라 오르기도 하고
거친 돌계단을 따라 오르기도 하노라면
하늘 향해 끝이 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숨가쁜 산행 길도
남쪽 저멀리 배내골이 내려다 보이는 전망대에서 한 숨 돌리게 합니다.
영남 알프스라....!
북서쪽으로는 제약산 사자봉과 가지산 줄기가 아스라이 펼쳐 집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내려오는 길에는
함께 들꽃을 내려다 봅니다.
작년 현충일 용추휴양림에서 보았던 노루발톱은
일년이 지난 날 다른 곳에서도 변함없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 화려하지도 모나지도 않게
보일듯 말듯 소박하게 피어있는 들풀들에게서
청안한 세상살이 꿈꾸어 봅니다.
하지만 그 청안함 속에서도
아들과 함께 소리없이 젖어 흔들리는 들꽃들을 바라 보며 걷노라니
요즘처럼 세상 어지럽던 80년대 대학 시절, 가까이 계시는 것 만으로도 든든한 힘이 되어 주셨던
도종환 선생님의 싯 구절이 떠 오르며
나도 모르게 한 구절 흥얼거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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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
함께 험한 길을 지나온 아들과 나는 예전의 두사람이 아닙니다.
서로 이야기는 하지 않아도 서로 한발자욱 다가 서 있음을 소년도 나도 압니다.
우렁차게 들리는 물소리와 함께 계곡으로 다시 내려옵니다.
하단에서 올라온듯한 사람들의 행렬이 파래소 폭포에 다가 왔음을 느끼게 합니다.
시원스레 떨어지는 파래소 폭포에서 땀을 식히고
한 줄기 빛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진가를 바라보며
덩달아 애가 닳은 나도 한개피 꺼내 물어 봅니다.
다시 휴양림 상단으로 돌아오는 그리 바쁠 것도 없는 길을 따라
맑디 맑은 계류는 지금도 몸을 숙여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소리 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휴일을 맞아 당일 놀이로 휴양림을 찾은 많은 분들이 자리를 함께 합니다.
우리도 각자 읽고 싶은 책 읽기로 한나절을 보냅니다.
저녁 준비를 하기 위해 함께 숲을 찾았다가 발견한 눈먼 더덕 한 뿌리...
한두 뿌리 재미로 캐다 나중에는 전문 심마니가 된 솔민이
(피는 속일 수 없는지, 이젠 대충 눈으로 훑어 보아도 아비보다 잘 찾습니다)
참취, 쇠비름, 민들레, 어린 생강나무 이파리와 더덕 몇 뿌리...
둘의 저녁 식사에 필요한 재료를 준비하고
목살과 더덕을 구워 저녁을 해결합니다.
다시 조용한 일상으로 돌아온 휴양림 캠핑장의 저녁을 맞이합니다.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둘만의 시간을 만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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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 텐트를 두드리는 빗소리에 잠을 설치며 토요일 이른 아침을 맞습니다.
캠핑장에서 맞는 아침은 언제나 여유롭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할지라도......
간밤 제법 싸늘한 날씨에 아침이 되어도 한기를 느껴 피운 모닥불
꺼져가는 불씨를 되살려 보려 애를 써 보지만 잘 되지 않는 눈치입니다.
(신불산 휴양림 상단은 오캠장 곳곳에 바베큐용 그릴을 비치해 두고 숯불이나 모닥불 피우는 것을 통제하지 않습니다.)
다시 캠핑 스쿨 문을 엽니다. 이번에는 불피우기 과정!
작은 가지를 모으고 점차 굵은 가지로... 녀석이 구해온 나무를 제법 그를듯 하게 재단합니다.
선생님의 역할이야 그저 바라보다 이리저리 원포인트(!)를 찍어 주면 그만.
혼자 힘으로 불 지피는데 성공한 녀석은
작은 기쁨을 누리고
나는 그 불 가에서 휴식을 취하면 그만입니다.
컴퓨터도, 만화책도, 닌텐도도 없고
둘만의 캠핑이라.... 숲 속의 캠핑이라 따분할 것 같지만
무궁무진한 놀잇감이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자연 속에서 익힌 공부는 학습지보다, 컴퓨터보다 더 오래 가나 봅니다.
작년 설악산 정모에서 배운 조릿대 잎 배 만들기를 오랫만에 해도 척척 만들어 냅니다.
운동하는 녀석 답지않게 평소 입이 짧은 솔민이도
둘만의 캠핑에서는 다투어 끼니를 해결합니다.
(하기야 변변한 과자 하나 없이 며칠을 보내려니....ㅋ)
저 물처럼 시간은 흘러 흘러...
토요일 근무를 마치고 함께 할 미리내를
밀양까지 마중나갈 시간이 다가 옵니다.
휴양림을 나서자 마자 오른편으로 난 임도에 간월재와 죽림굴의 이정표가 보입니다.
시간도 여유가 있겠다. 차를 몰고 가 봅니다.
몇 키로 임도를 따라가다 보니 몇몇 후기에서 보았던 그 풍경이 펼쳐 집니다.
간월산까지 왕복 1.5km....
솔민이에게는 천원짜리 이프로 한캔을 손에 쥐어 주고 동의를 구해
아름답게 펼쳐진 간월재의 억새 평원을 내려다보며 잠시 산을 오르기로 합니다.
그림처럼 펼쳐 진 신불산 나뭇길을 뒤로 한 채
오른쪽 너머로는 울산 땅을 내려다 보며
드 넓은 억새 평원에서 시간을 보내 봅니다.
소중한 2%는 꼬옥 간직한 채...
찔끔 찔끔 아껴가며 마시던 음료를 정상에서 들이켜 봅니다.
풍족한 살이보다 2% 부족한 삶이 오히려 소중함을 깨닫을 날이 언제나 오련지....
저 멀리 산 넘어 도착하고 있을 엄마를 생각하고 있는 걸까요?
그렇게 캠핑장의 단짝은 다시 만났습니다.
몇해가 흘러도 저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는 백련사를 지나
오랫만에 호박소 계곡을 찾아 봅니다.
'한국의 名水 100선'에 든 호박소 계곡에서
시원스레 펼쳐진 경치를 감상해 봅니다.
사흘 만에 만난 세 가족이지만
엄청 오랫만에 만난 사람들처럼 반갑기 그지 없습니다.
미리내가 사온 도리육을 가지고
이번 캠핑 최고의 식단을 맞이 합니다.
미리벌표 와인 한잔씩을 들며
오랜만에 둘만의 시간으로 신불산에서의 마지막 밤을 떠나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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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빗소리가, 오늘은 청아한 산새 소리가 새벽잠을 깨웁니다.
잠이야 낮에도 잘 수 있고... 새벽녁 산사가 그리워 식구들을 깨웁니다.
배내 고개 너머 산 아래 있는
'석남사'를 찾아 봅니다.
가지산 자락에 위치한 석남사는
그리 큰 규모도 화려한 모습도 하지 않은 정갈한 절집입니다.
비구니 스님들의 도량인 이 절집에서는
궁궐같은 사찰에서 찾을 수 없는 그 무언가 정겨움이 넘쳐 흐릅니다.
예불 드리는 보살님들만이 분주한 이른 아침 절집....
새벽 예불을 마친 저 자리...
나도 따라 마음 가득 편안함을 덤으로 얻습니다.
비구니 스님들의 섬세한 손길이 닿아 있는
작은 정원들이 소담스럽습니다.
꽃밭 가의 돌 계단에 걸터 앉아
정성어린 손길로 피어 난 초롱꽃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겨 봅니다.
도종환 선생님의 말처럼
'이분 쉼표로 불어오는 바람에도, 가녀린 꽃 잎 한 장에도
우주의 섭리가 들어 있다는 걸' 느낍니다.
'작은 것들에 마음 쓸 줄 아는 진솔한 마음 한 자락'
그 속에 어찌 부처가 없을까요?
일요일 이른 아침은 둘이서 혹은 셋이서 그리 시간을 보내 봅니다.
분노와 혼란, 냉정과 열정이 뒤 엉킨 속세를 잠시 떠나
선원 앞을 흐르는 계류에 잠시 마음을 씻어 봅니다.
하지만, 미처 씻지 못한 몸의 때는
절 아래 가지산 온천을 찾아 마저 씻어 봅니다.(^^*)
시설은 그리 화려하지 않지만, 오천원 정도면 수영장과 노천탕도 함께 이용할 수 있는 이 곳
다음 번 신불산 캠핑의 필수 코스입니다. (미리내는 동의할지 몰라도...)
이른 아침부터 설쳐 댄지라
캠핑장에 돌아와 남은 음식으로 차린 아침상을 말끔히 비웁니다.
그리곤 각자의 시간을 가집니다.
토요일 예정된 빗님은 용케도 잘 참아 주시더니
일요일 저녁 늦게야 나린다는 예보가 캠핑장의 오후를 한결 여유롭게 만듭니다.
비빔 라면으로 점심을...
교대로 느긋하게 낮잠 한숨씩 즐기고
늦은 오후, 몇 안되는 살림살이를 접어 봅니다.
엄마를 만난 기쁨과 함께 예상되었던 문제집의 굴레에서 해방되는 순간
'아들아! 환희와 근심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따로 떼어 놓을래야 놓을 수 없는 거란다!' ㅋㅋ
돌아오는 길은 배내골 아래 밀양댐을 거쳐 돌아 옵니다.
고향집을 물에 묻은 저들만큼이야 못하겠지만
저 아래 농암대 물 좋고 바위 수려하던 곳은
미리내와 함께 1992년 둘만의 최초 야영을 했던 곳이니
나도 저 망향비를 보며 허탈한 심기에 한가닥의 위안을 삼아 봅니다. (ㅡ,.ㅡ"")
밀양댐 아래 고례, 평리 마을을 돌아 내려오는 순간
먼발치의 물가에 타프가 한 동 눈에 들어 옵니다.
'그래! 저 쯤이면 캠핑도 가능한 곳인데....'
아니나 다를까 겨울나그네 형님이 철수 중입니다.
물 좋기로 유명한 고례 골짝물이 흐르는 이 곳
뜨거운 태양과 행락객이 잦아드는 계절에 다시 찾아 보리라 생각하며 길을 재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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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 둘만의 휴식같은 캠핑을 꿈꾸며 찾아간 이번 캠핑은
자연과 가까운 친구가 되어 보고
배내고개 자욱히 끼었던 안개처럼 답답한 세상살이
시원한 물줄기에 잠시 씻어도 보며
휴식과 즐거움이 함께 한 캠핑이었습니다.
그리고
둘이라서 가질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
'이해의 침대'를 통해 하나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상으로 돌아 온 지금
그곳에 두고 온 숲 길의 외침이 마음 속 잔상으로 남아
아직도 가슴 한 켠을 두드립니다.
'그대 언제 다시 이 숲에 오시렵니까...'
2008.6.5-8
신불산폭포자연휴양림에서